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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여천NCC 사태’ 이후 석유화학 산업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무너지자 관련 채권 가격이 급락하고 있다. 여천NCC가 과거 발행한 채권 다수는 민간 평가사가 책정한 금리인 민평금리보다 약 1000bp(bp=0.01%포인트) 높은 금리로 계약이 체결되는 상황이다. 만기가 약 6개월 남은 채권을 투자자들이 투매할 정도로 투심이 얼어붙어 산업계 전반의 자금 조달 여건은 한층 악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27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발행돼 만기가 약 6개월 남은 여천NCC 공모 회사채 78회는 26일 민간 전문 채권 평가사 4곳이 평가한 민평금리(3.627%)보다 1113bp 높은 14.763%의 금리로 장내 채권 시장에서 계약이 체결됐다. 이 채권은 여천NCC 사태가 불거지기 직전인 이달 초까지만 해도 민평금리 대비 150~174bp 높은 수준으로 거래됐지만 이후 유통금리가 민평 대비 1000bp 이상으로 치솟았다. 채권은 약정에 따라 만기까지 지급하는 이자와 원금이 고정된 금융 상품인 만큼 유통금리(이자율)가 급격히 높아진다는 것은 가격이 폭락한다는 것을 뜻한다. 채권 금리와 가격은 반대로 움직인다.
석유화학 기업을 중심으로 치솟는 채권금리는 비우량 채권 발행 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동일 기업, 유사 구조를 가진 상품을 기준으로 볼 때 유통금리가 높아지면 신규 발행 채권의 금리를 덩달아 올려야 채권을 매입할 투자자를 모집할 수 있다. 유통금리는 높은데 발행금리가 낮으면 예상 수익률과 리스크에 따라 움직이는 투자자들은 수익률이 낮은 발행 시장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금 조달을 하려는 기업의 재무 부담 가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김상인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시장 참가자 누구도 (비우량 기업에 대한) 투자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당분간 관련 회사채를 발행하려 해도 시장이 이를 받아주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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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화학 채권 투자자들이 사채 금리에 육박하는 고금리로 자산을 투매하자 채권 만기와 상환을 앞둔 기업들의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다. 국내 주요 석유화학 기업은 내년 3월까지 4조 3000억 원 규모의 시장성 차입금을 상환해야 하는데 치솟는 유통금리로 인해 채권을 신규 발행해 기존 채권을 차환하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올 들어 국내 채권시장에서는 석유화학 외에도 건설·콘텐츠 등 취약 업종 기업들이 줄줄이 비우량 채권 발행에 실패하고 있어 산업계 전반으로 여진이 이어질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여천NCC는 이달 중순 부도 위기를 겪은 후 채권 유통금리가 민평금리보다 1000bp 이상 높아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내년 3월이 만기인 여천NCC 공모 회사채 73-2회는 이달 초까지 민평금리 대비 79~130bp 높은 수준으로 거래됐지만 유통·민평금리 차가 이달 11일 819bp로 대폭 커진 데 이어 26일에는 1114bp까지 확대됐다. 위기가 불거진 직후보다 최근 유통금리가 높아진 것인데 이는 대주주의 자금 지원이 이뤄졌음에도 투자심리는 오히려 악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채권금리와 가격은 반대로 움직인다.
여천NCC 외 석유화학 기업의 금리 역시 치솟고 있다. 한화솔루션 공모 회사채 285-2회는 지난달 28일만 해도 민평금리보다 55bp 낮게 거래됐지만 이달 22일에는 유통·민평금리 차가 306bp로 확대됐다. 이 채권 역시 여천NCC 사태 직후보다 민평금리와 유통금리 간 차이가 벌어지는 분위기다. 내년 1월이 만기인 SK지오센트릭 공모 회사채 20-2회는 유통·민평금리 차가 지난달 30일 0bp에서 이달 21일 229bp로 벌어졌다. 석유화학 업종 전반에 걸쳐 ‘유통 채권 쇼크’가 나타나는 모습이다.
국내 주요 석유화학 기업은 내년 3월까지 4조 2900억 원의 회사채·기업어음(CP) 등 시장성 차입금을 상환해야 한다. 한화솔루션은 3650억 원의 회사채와 1조 원의 CP 만기를 앞두고 있고 한화토탈에너지스는 2300억 원의 회사채와 4200억 원의 CP를 상환해야 한다. 위기의 중심인 여천NCC 역시 6개월 내 회사채 2100억 원과 CP 200억 원 등 2300억 원의 차입금 만기가 돌아온다. 최근 석유화학 기업에 대한 시장 신뢰가 급격히 꺾인 상황이어서 기업에 따라서는 새로 채권 등을 발행해 차입금을 돌려주는 것이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이승재 iM증권 연구원은 “빨리 물량을 넘기려는 일부 투자자들의 투매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며 “지속적으로 유동성 부담이 큰 상태에서 일각에서는 채무불이행(EOD) 발생이 가능하다는 시각도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추가적인 시장성 차입은 힘들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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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20일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 방안을 제시하면서 생산량 자율 감축을 기업들에 요구했다. 석유화학 업계는 나프타분해설비(NCC) 생산능력을 최대 25% 감축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정부와 합의했지만 기업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생산량을 줄일지에 대해서는 확정된 바가 없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 다수는 각기 다른 대기업집단에서 공동 설립한 후 지분을 나눠 갖고 있어 구조조정 및 자금 지원에 대한 이해관계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석유화학 업계를 중심으로 한 자금 경색 우려는 산업계 전반의 회사채 투자심리에도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올 상반기 홈플러스 디폴트(채무 불이행)와 롯데손해보험의 후순위채 콜옵션(조기상환권) 행사 연기 사태 이후 비우량 채권에 대한 시장 불신이 강해진 상황이어서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들이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최근 들어 비우량 채권의 미매각 사태가 이어지는 상황이다. 이달 21일 수요예측을 진행한 이랜드월드(신용등급 BBB0)는 최소 300억 원을 모집했지만 160억 원의 유효 주문만을 받아 목표액을 채우지 못했다. JTBC(BBB)는 500억 원 모집에서 단 한 건의 기관 주문도 받아내지 못해 발행 물량이 전량 미매각됐다. 앞서 CJ CGV와 롯데건설 또한 미매각 사태를 피하지 못하며 비우량채를 대상으로 한 시장 내 우려를 키웠다. 두 기업의 회사채 신용등급은 각각 A-와 A로 비우량 등급으로 분류된다.
국내 한 증권사의 부채자본시장(DCM) 본부장은 “신용등급이 낮고 모회사 지원 가능성이 불투명한 기업을 위주로 위기가 지속 발생할 수 있다”며 “사업 영역이 다각화돼 있고 모회사 자금력이 탄탄한 기업은 펀더멘털(기초 체력)이 있어 위기를 돌파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석유화학 기업들은 일부 우량 기업을 제외하면 신규 채권 발행이 어려워져 모회사 등의 지원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부는 은행권에 약 16조 원 규모의 여신 회수 자제를 당부했지만 회사채나 CP 등 시장성 차입금에 대해서는 지원 계획이 없음을 밝혔다. 기업들이 새로 채권을 발행해 차환하거나 자체 자금으로 상환에 나서야 하는 상황인데 투자심리 악화로 기존 채권 차환은 여의치 않다. 신한투자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석유화학사 회사채는 부도 위험에 여전히 노출될 것으로 보인다”며 “유동성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대주주 사재 출연, 유휴 자산 매각 등이 요구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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