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기획위원회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내년 1월부터 시행 예정인 인공지능(AI)기본법과 관련해 규제 조항을 3년 유예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국내 정보기술(IT) 업계에 이어 미국 빅테크들도 ‘고영향 AI’ 규정 등을 들어 한국 내 AI 사업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입장을 전달하면서다. 이에 더해 이재명 대통령이 AI미래기획수석과 과기정통부 장관으로 민간 전문가를 발탁한데서 알 수 있듯이 규제보다 진흥 중심의 AI 정책을 강화하고 있는 점도 규제 유예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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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국정기획위와 과기정통부는 AI기본법 내 규제만 3년 미루는 개정안을 통과시켜 법상 AI 진흥 관련 조항만 우선 시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국정기획위 소속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AI 사업자에 대한 의무나 책임을 부과하는 규제 조항 시행일을 3년 유예하는 내용을 담은 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AI기본법은 산업 육성과 위험 관리 등 신뢰 기반 조성을 골자로 한다. AI를 생명·안전·기본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고영향 AI’와 ‘일반 AI’로 구분하고 고영향 AI 사업자를 대상으로 사전 고지와 검·인증 의무를 부여한다. 생성형 AI로 합성한 영상이나 사진에는 워터마크 삽입이 의무화된다.
이와 관련해 구글·애플·마이크로소프트·메타 등 미국 빅테크 기업이 속한 정보기술산업협회(ITI)의 한국 지부는 최근 정부에 AI기본법에 대해 우려하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도 이 같은 입장을 공유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빅테크 업체들이 가장 우려하는 조항은 고영향 AI로 아직 연구 단계인 범용인공지능(AGI)이 지정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보다 진화한 AGI는 자율적 사고 능력을 기반으로 의료·금융·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어 고영향 AI 규제 가시권에 있다는 얘기다.
국내 IT 기업들은 워터마크 규제가 미칠 영향에 주목한다. AI기본법 제31조에는 AI 사업자가 생성형 AI 또는 이를 이용한 제품 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 그 결과물이 생성형 AI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표시해야 한다고 명시돼있다. 이 규제가 도입되면 영화·드라마·웹툰 등에 워터마크를 표시해야 해 K콘텐츠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AI기본법을 둘러싼 국내외 IT 업계 우려가 거세지면서 법상 규제를 3년 유예하는 안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AI 규제 완화 방침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 과정에서 지렛대로 활용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더구나 이 대통령이 네이버 출신 하정우 AI수석과 LG AI연구원 출신 배경훈 과기정통부 장관 후보자를 발탁하면서 규제보다는 육성·진흥에 AI 정책 초점이 맞춰지는 모습이다.
해외 입법 동향도 당정의 AI기본법 관련 방침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의 AI기본법은 유럽연합(EU)의 AI법(AI Act)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제정된 AI 법률이다. 하지만 법 시행 시점은 내년 8월인 EU보다 반년 가량 앞선다. 미국 컴퓨터통신산업협회(CCIA)는 지난달 2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의에서 AI법 시행 시점을 연기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AI 등 개념을 구체화하고 고영향 AI 등 규정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법 개선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한국인공지능법학회는 지난달 학술대회를 열어 고영향 AI를 권익 영향과 안전 영향으로 구분해 명확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법상 AI 사업자, 이용사업자, 이용자 등 개념에 혼선이 없도록 분명히 할 것을 주문했다.
한편 당정은 국정기획위 운영 기간이 끝나는 대로 AI기본법 관련 방침을 확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과기정통부는 AI 규제 권한을 다른 부처로 분산하지 않고 일임해줄 것을 국정기획위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AI가 적용되는 산업군에 따라 부처 권한이 나눠지면 AI 정책에 혼선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과기정통부 고위 관계자는 “AI기본법과 관련해 외국계 기업을 포함해 업계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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