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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주 원칙적 소각’을 추진 중인 이재명 정부가 기업들이 이미 보유 중인 자사주는 강제로 소각하기보다는 처분을 까다롭게 만들어 주주가치를 보호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사주 비중이 높은 상장사들은 한숨 돌렸으나 자사주를 최대주주에게 처분하는 등 다른 계획을 갖고 있던 상장사들은 당장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18일 국정기획위원회의 ‘대한민국 진짜 성장을 위한 전략’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상장사 자사주에 대한 원칙적 소각 근거를 마련하고 기보유 자사주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규제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명시됐다. 이재명 대통령이 후보 시절 ‘자사주 원칙적 소각’ 기조를 언급한 이후 구체적인 정책 방향이 처음 공개된 것이다.
국정기획위는 상법과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자사주 취득은 상여금 지급이나 주식 보상 등을 제외하고 소각을 목적으로 한 경우에만 허용하기로 했다. 해당 자사주는 일정 기간 안에 모두 소각하는 등 원칙을 제시하겠다는 구상이다. 상장사들이 가장 크게 관심을 가졌던 기보유 자사주에 대해서는 유예기간을 충분히 부여하되 자사주 처분 시 신주 발행 절차를 준용해 심사를 거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정태준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기보유 자사주는 처분을 어렵게 하는 것이지 강제로 소각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갖고 있는 자사주를 반드시 소각해야 한다는 내용이 직접 언급되지 않자 자사주 보유 비중이 높은 상장사들은 일단 안도하는 분위기다. 올해 3월 말 기준으로 자사주 비중이 높은 신영증권(53.1%), 인포바인(51.5%), 일성아이에스(48.8%), 조광피혁(47.0%), 부국증권(42.7%), 매커스(44.4%) 등은 당분간 자사주를 보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자사주를 주주가치 제고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활용할 계획을 갖고 있던 상장사다. 그동안 상장사 대부분은 자사주를 취득할 때는 주주가치 제고 목적으로 공시한 뒤 실제로는 인수합병(M&A), 교환사채(EB) 발행, 타법인 주식 양수 대금 지급, 투자 자금 마련 등 다른 목적으로 처분하는 사례가 많았다. 지배주주에게 자사주를 직접 처분하거나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급증했다. 지난달 호반건설 경영권 위협에 맞서 LS와 한진칼이 자사주를 방어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자사주 비중이 32.5%에 달하는 롯데지주도 투자 자금 조달을 위해 자사주 15%를 지배주주 및 특수관계인에게 매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시장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했으나 새 정부 정책상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솔루엠은 지난달 대표이사에게 211억 원 규모 자사주를 처분하려고 했다가 취득 가격보다 낮은 처분 가격 등으로 각종 논란이 불거지면서 이를 철회하기도 했다.
자사주 비중이 높은 신원(26.82%)은 자사주를 사업 확장에 이용하겠다는 방침이다. 신풍(20.75%), 나이스정보통신(12.64%) 등도 자사주를 M&A 활용 목적으로 제시한 상태다. 한화투자증권 분석 결과 올해 자사주 처분을 공시한 상장사 가운데 16.5%가 자금 조달 목적이었고 표면적으로 직원 복지 등을 언급했으나 대주주 지배력 강화 등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는 사례도 11.4%로 나타났다.
현행법상 별다른 규제가 없어 이사회 의결만으로 쉽게 처분할 수 있었는데 새 정부에서 신주 발행 수준으로 규제 강도를 높이면 당국 심사 등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처분이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자사주를 팔거나 신주를 발행해 외부 자금을 조달하는 행위 모두 유통 주식 수 증가와 현금 유입으로 이어지는 만큼 동일 규제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엄수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자사주를 이사회 결의를 통해 제3자에 처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주주 권익 침해를 가져올 여지가 분명 있다”며 “특히 개인 최대주주나 계열사에 자사주를 처분하는 것은 부당 지원까지 해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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