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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인터뷰의 마지막, 예정에 없는 질문을 던지자 장하준 런던대 경제학과 교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20대 초반까지를 제외하면 줄곧 영국에서 바라본 한국에 대한 소회가 얼마나 많을까. 이내 결심한 듯 그는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제일 멋있는 나라인데 한편으로는 제일 비참한 나라”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어쩐지 앞보다는 뒤에 무게가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느끼듯 외국인들의 한국을 향한 열광은 놀라움을 넘어 의아할 정도다. 투자 업계에서도 글로벌 투자기관 근무자들이 올리브영에서 쇼핑하기 위해 한국 출장을 가장 선호한다는 말이 들린다. 최근 글로벌 사모펀드(PEF)가 국내 업계 1위 준오헤어와 화장품 용기 제조사인 삼화를 8000억 원에 인수한다는 소식 역시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필두로 한 콘텐츠 역시 영화·뮤지컬·소설 등 다방면에서 환호를 받고 있다. 빨리빨리 문화도 예전과 달리 호감의 대상이 됐다. 세탁소·안경점처럼 우리의 일상도 빠르게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장점을 본 글로벌 PEF의 관심 목록에 올라 있다.
반면 장 교수가 언급한 비참함에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 노인 빈곤율, 남녀 임금 격차가 있다. 오로지 성장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이 성과만큼 폐해를 쌓은 것이다.
이제는 빛과 그늘을 아우르는 해법이 필요하다. 의대로 쏠리지 않아도 괜찮은 직장에서 오래 일할 수 있고 노후에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려면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부자에게 매기는 세금으로는 그늘을 밝힐 재원을 감당하기 어렵다.
장 교수는 지난 25년간 이 문제의 해법으로 대기업 오너가와 사회의 대타협을 통한 복지 강화를 주장해왔다. 지금까지는 각자 한쪽만 바라보는 기업과 사회 모두에서 환영받지 못한 주장이지만 이제는 달라질 때다. 이번 관세 협상에서 정부와 기업 오너가 보여준 ‘원팀 행보’는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오랜만에 기업가다운 역할을 해냈다.
오너가는 누가 뭐라 해도 주주보다는 기업 생존의 무게를 지는 사람들이다. 상속세 폭탄 대신 승계의 길을 터서 그들의 책임감을 존중해주자. 대신 정상적인 기업 성장을 막을 만큼 수익을 가져가거나, 횡포를 부리는 만큼만 제한하자. 대신 그들 역시 사회에 상당한 재원을 내놓아야 한다.
최근 한국에서 활발하게 투자 활동을 하는 EQT파트너스의 모회사는 발렌베리 가문이다. 6대째 승계한 오너가의 자산이 많아야 600억 원 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대기업 오너 중에 비슷한 규모의 자산만 남기고 사회에 환원하고, 국민들은 오너가의 승계를 지지하는 그림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 정도의 결단이 있어야 사회적 대타협이라고 할 수 있죠.” 장 교수가 남긴 마지막 말이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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