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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신규 발행 회사채 대부분이 기존 채무를 갚기 위해서인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지난달 신규 발행된 회사채 98%는 차환 목적이었다. 반면 신규 시설 투자나 운영 자금 확보를 위한 차입은 줄어들어 기업의 저성장 국면이 자금 시장에도 반영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전반적인 기업부채가 늘어나는 가운데서도 신용등급이 BBB+급에 못 미치는 비우량 기업은 고금리 사모채나 자산 담보 유동화증권 시장으로 내몰려 기업별 자금 조달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11일 서울경제신문이 금융감독원 자료와 한국예탁결제원 통계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올 들어 신규 발행된 공모 회사채 34조 7560억 원 중 29조 67억 원(83.5%)는 기존 채무 차환이 목적이다. 신규 발행 채권의 용도는 크게 △시설 자금 △운전 자금 △차환 자금으로 나뉘는데 새로운 시설에 투자하거나 사업을 운영하기보다는 과거 낸 빚을 갚기 위해 새로운 빚을 내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이런 경향은 최근 들어 더욱 뚜렷해져 지난달 발행 회사채 1조 9400억 원 중 97.9%인 1조 9000억 원이 차환 목적이었다.
올 들어 회사채 신규 발행 시장은 활황을 띠고 있다. 연초부터 이날까지 신규 발행된 회사채는 공모채와 사모채를 통틀어 67조 4832억 원 규모인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57조 5238억 원)과 비교해 10조 원가량 많다. 특히 올해 순발행 회사채는 19조 6225억 원으로 지난해 9조 9529억 원의 2배 수준이다. 통화 당국의 연이은 금리 인하와 글로벌 증시 변동성에 따라 채권시장이 안정적인 대체투자처로 주목받자 우호적인 금리 환경에서 기업들이 잇달아 신규 채권을 발행해 기존 채무를 갚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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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한화에너지는 이달 2일 발행한 1700억 원 규모의 회사채 전액을 기존 금융권 대출과 만기 도래 회사채를 갚는 데 사용할 계획이다. 기존 대출보다 낮은 금리로 채권을 발행해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효과가 있지만 부채가 지난해 말 9조 4775억 원에서 올 1분기 9조 8107억 원으로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문제다. 올 3월 8000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한 SK이노베이션은 민평금리(민간 채권평가사가 책정한 기업의 고유 금리)보다 높은 이자율을 지급하면서 전액을 채무 상환에 사용했다.
신규 채권 발행이 늘어나는 가운데 BBB+급 미만 신용등급을 가진 기업들은 채권 발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올 들어 SLL중앙(신용등급 BBB)·이랜드월드(BBB)·두산퓨얼셀(BBB) 등 다수의 ‘BBB0’급 기업이 회사채 수요예측의 목표액을 채우지 못했는데 이런 미매각 사태가 늘어나면서 같은 신용등급을 가진 기업들은 고금리 사모채 시장으로 몰리는 중이다. 한 증권사 임원은 “공모채 발행이 어려워진 기업들은 보유 자산을 담보로 유동화증권을 발행하거나 비싼 사모채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고 전했다.
올해 들어 자산유동화 전자단기사채(ABSTB) 등 유동화증권이나 주가수익스와프(PRS)처럼 파생상품을 활용한 자금 조달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연초부터 이날까지 발행된 비등록 유동화증권은 약 231조 7000억 원인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52조 1600억 원(29.1%) 많다. 최근 8개월 동안 PRS로 자금을 마련한 규모는 약 4조 4000억 원에 달하는데 PRS는 미래 주가가 기준가를 밑돌면 차액을 발행 기업이 보전해야 하는 구조여서 장기적으로는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
금융투자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저성장 국면이 고착화하면서 위험과 기회가 동반된 신규 투자보다는 과거 빌린 고금리 빚을 갚는 데 회사채를 활용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라며 “우리 경제 내에 뚜렷한 신성장 동력이 나타나지 않는 한 금리 환경에 의존해 빚으로 빚을 갚는 사례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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