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스타트업 시장이 위축되며 최근 1년 사이 권고사직 등 비자발적으로 회사를 떠난 이들 가운데 임금 체불로 고통 받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비자발적 퇴사자들은 경기 침체로 인한 취업난 속에서 퇴직금 미지급 등 경제적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을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 정책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재취업 준비 등에 유의미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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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서울경제신문이 비즈니스 플랫폼 리멤버앤컴퍼니와 공동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스타트업을 퇴사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불안정성을 이유로 회사를 떠났다. 리멤버 앱 회원 가운데 208명의 스타트업 퇴사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불투명한 회사의 미래’를 퇴사 사유로 꼽은 응답자는 64명(30.8%), ‘회사 경영난으로 인한 비자발적 퇴사’는 51명(24.5%)으로 나타났다. 전체 퇴사자의 55.3%가 회사의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이나 안정성 문제로 퇴사를 결정한 셈이다. 이외에도 ‘상사·동료와의 갈등(18.3%)’ ‘높은 업무 강도(7.7%)’ ‘적성에 맞지 않는 직무(7.7%)’ ‘연봉(5.8%)’ 등이 퇴사 사유로 꼽혔다.
비자발적 퇴사자들은 퇴직 이전부터 임금 체불 문제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비자발적 퇴사를 했다고 밝힌 50명 중 24명은 임금 체불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3개월 이상 임금을 받지 못한 응답자는 50명 중 12명에 달했고 3명의 응답자는 1년 이상 밀린 임금을 받지 못했다. 실제 사례를 살펴보면 경영난에 빠져 임금 체불 문제가 발생하다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 스타트업 취업자들이 비자발적 퇴사에 내몰리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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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금 미지급은 비자발적 퇴사자들의 발목을 잡았다. 퇴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경우는 응답자 36명 중 14명으로 전체 응답자 중 38.9%가 이와 같은 퇴직금 미지급 사례에 해당한다. 퇴직금 전액 가까이를 받지 못한 사례도 일부 있었다.
갑작스럽게 직장을 잃은 비자발적 퇴사자들은 퇴사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갑작스러운 통보로 인한 정신적 충격 및 자존감 하락(44%)’을 먼저 꼽았다. ‘임금 체불’과 ‘퇴직금 지연 및 미지급’이 각각 16%로 그 뒤를 이었다. 퇴사 이후에도 이들은 ‘재취업 준비의 어려움(43.9%)’ ‘미래에 대한 불안감(34.1%)’ 등으로 경제적·심리적 압박을 받았다고 답했다.
전반적인 경기 침체가 심화되며 비자발적 퇴사자들은 재취업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퇴사 이후 현재까지 구직 중인 퇴사자 34명 중 20명은 ‘지원 후 합격한 곳이 없음’을 구직 사유로 들었다. 이밖에도 구직이 어려운 사유에는 ‘원하는 직무·회사의 채용 공고가 없음’ ‘연봉, 근무 환경 등 원하는 여건의 일자리를 찾지 못함’ 등 기업들의 고용 난색과 연관된 응답이 주를 이뤘다. 이처럼 열악한 고용 환경 속에서 비자발적 퇴사자들은 일자리를 원해도 제대로 된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실정이다.
비자발적 퇴사자 지원을 위한 정부 정책에도 사각지대가 존재했다. 비자발적 퇴사 이후 정부의 실질적인 재취업 지원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이들은 43명 중 17명으로 응답자의 약 40%에 달했다. 정부는 비자발적 퇴사자 구제를 위해 국민취업지원제도·내일배움카드 등의 지원 방안을 실시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실업급여를 제외한 정부 지원 방안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응답자가 거의 없었다. 국민취업지원제도는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구직자에게 취업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이며 국민내일배움카드는 실업자나 재직자 등 직업훈련이 필요한 국민에게 5년간 최대 500만 원까지 훈련비를 지원하는 통합 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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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불안정성이 큰 스타트업 고용 환경에서 비자발적 퇴사자에 대한 제도적 보호 강화를 촉구했다. 창업과 폐업이 빈번한 스타트업 생태계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이 취약한 고용 상황에 놓인 만큼 별도의 구제 방안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스타트업은 업계 자체의 리스크가 존재하기 때문에 실패할 경우 취업자들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이 크다”며 “스타트업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취업자들이 다음 도전을 할 수 있도록 고용 지원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기대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센터장은 “고금리 국면에서 투자 혹한기가 이어지며 존폐 기로에 놓인 스타트업이 늘어나고 있다”면서도 “임금 체불, 퇴직금 미지급과 같은 문제는 위기에 대한 경고등이 일찌감치 켜졌는데도 선제적으로 자본금을 관리하지 못한 경영진의 책임이 크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챗GPT 등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전으로 기존 플랫폼 기업에서 일하던 개발자·디자이너 등 한때 스타트업의 주축이었던 직군들이 아예 기술적으로 필요가 없어지는 상황까지 겹치면서 고용난이 더욱 극심해지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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