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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공모주 투자 열풍에다 정부의 대출 규제 전 막차 수요까지 몰리며 지난달 신용 대출이 사상 최대폭으로 증가했다. 반면 정기예금에서는 13조 원에 육박하는 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예금에서 투자로의 ‘머니무브’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고 있다.
3일 KB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 등 5대 시중은행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이들 은행의 신용 대출 잔액은 142조 2,278억 원으로 140조 원을 넘어서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전월보다 6조 8,401억 원 급증한 수치다. 5대 은행 신용 대출 잔액은 지난해 11월 빚을 내 주식 투자를 하는 ‘빚투’, 최대한의 대출을 동원해 집을 사는 ‘영끌’로 4조 8,495억 원 늘며 사상 최대 증가폭을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5개월 만에 2조 원에 가까운 격차로 이를 경신했다.
신용 대출 잔액을 보면 지난해 11월 급증한 후 금융 당국의 압박으로 은행들이 대출 한도를 줄이고 우대금리를 폐지하면서 증가세도 주춤했다. 지난해 12월에는 444억 원 감소했고 올 1월 1조 5,918억 원 늘기는 했지만 2월 556억 원 감소, 3월 2,034억 원 증가 등으로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신용 대출, 마이너스 통장 대출 등을 통해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에 투자하는 사람이 많아지며 4월 신용 대출 잔액을 끌어올렸다. 또 SKIET의 기업공개(IPO)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달 28~29일 열린 공모주 청약에서 증거금으로 약 81조 원이 몰렸고 이 중 상당 부분이 신용 대출과 마이너스 통장 대출로 충당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달 29일 발표된 금융 당국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강화 방안도 한 요인으로 보인다. 오는 7월부터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면 신용 대출 한도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 사람들이 ‘막차’ 신용 대출을 일으킨 것이다. 실제 A 은행의 일별 신용 대출 잔액을 보면 대책이 나온 다음 날인 30일 신규 신용대출 액수가 595억 원, 건수가 2,022건이었다. 4월 1일부터 20일까지 일평균 신규 금액(357억 원), 건수(1,650건)를 웃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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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유가족이 상속세를 내기 위해 시중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지만 이는 신용 대출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은 지난달 30일 1차 상속세분을 납부하기 위해 시중은행 2곳에서 약 4,000억 원의 대출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이 액수가 4월 신용 대출 잔액에 포함돼도 신용 대출 순수 증가액은 6조 4,000억 원대로 여전히 사상 최대 규모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만약 주식 등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면 이는 신용 대출이 아닌 담보대출로 평가돼 신용 대출 수치에 반영이 안 됐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신용 대출 속도 조절을 주문해온 금융 당국도 머쓱해지게 됐다. 당국은 지난해 말 신용 대출이 급증하자 주요 은행 여신담당 부행장과 화상회의를 열고 5대 은행 월간 신용 대출 증가 폭을 2조 원 이내로 관리하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도 금융감독원 주재의 시중은행 여신 담당 부행장 회의 등을 열고 은행들도 한도 축소, 우대금리 축소 등 신용 대출 조이기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반면 정기예금 잔액은 크게 줄었다. 5대 은행 4월 말 정기예금 잔액은 614조 7,991억 원으로 전월보다 12조 8,814억 원 감소했다. 정기예금 잔액이 10조 원 넘게 감소한 것은 드문 일이다. 지난해 12월 7조 4,765억 원, 올해 1월 5조 5,156억 원 빠진 후 2월 3조 4,552억 원 반짝 증가했지만 3월 2조 6,667억 원 줄어드는 등 감소세가 계속되고 있다. 정기적금 잔액 역시 35조 4,430억 원으로 2,741억 원 감소했다. 정기예적금 금리가 0%대에 머물러 있고 부동산·주식·암호화폐 등 자산 가격은 급등하자 ‘쥐꼬리’ 이자를 받을 바에 각종 자산에 투자하는 흐름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이태규 기자 classi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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